감성 여행기
선교장 풍경사진

아량 넓은 만석꾼의 집

선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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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장

  • 위치 : 강원도 강릉시 운정길 63
  • 문의 : 033-648-5303
  • 이용시간 : 매일 하절기 09:00 - 18:00 동절기09:00 - 17:00
  • 홈페이지 : http://www.knsgj.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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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선교장은 전주 이씨 효령대군(세종대왕의 형)의 11대 후손 가선대부(嘉善大夫) 무경(茂卿) 이내번(李乃蕃)에 의해 처음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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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 충주에 살던 이내번은 가세가 기울자 어머니(안동 권씨)의 외가 근처인 강릉 경포대로 거처를 옮겨왔다. 재산이 모이자 집을 새로 짓기 위해 터를 알아보던 어느날 이내번은 족제비 떼가 이동하는 모습을 보았고,
그 뒤를 따라가 그 자리에 선교장을 지었다. 이후 가세는 더욱 번창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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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300년이 넘도록 후대에 의해 발전, 증축되어 지금의 선교장이 되었다.

3만 평의 땅에 왕이 아닌 자가 지을 수 있는 최대치인 99칸의 방으로 이루어진 으리으리한 이 집은
그 아름다움과 문화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민간주택 최초로 국가지정 중요민속문화제 제5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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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장이라는 이름은 한자로 배 선(船), 다리 교(橋)가 합쳐진 것이다.
당시에 경포호는 지금보다 훨씬 넓어 선교장 앞까지 물이 닿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선교장을 다녀가기 위해서는 배를 타고 건너야 했기에 배다리(船橋)라는 의미의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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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표소를 지나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활래정(活來亭)이다.
연못의 오른쪽에 있는 월하문을 통해 활래정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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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하문은 당나라 시인 가도의 시 '새는 못가의 나무에서 잠자고(鳥宿池邊樹), 스님은 달 아래 문을 두드린다(僧敲月下門)'에서 따온 것이다.
늦은 밤이라도 묵고 갈 나그네는 망설이지 말고 문을 두드리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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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모난 인공연못 위에 떠있는 이 네모난 정자는 금강산과 관동팔경을 유람하던 선비들이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풍류를 읊던 곳이다.
활래정(活來亭)은 주자(朱子)의 시구 중 끝없이 흐르는 맑은 물을 의미하는 활수래(活水來)에서 따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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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래정에는 벽마다 막힌 곳 없이 문으로 되어 있어 어느 방향으로든 하늘과 연못, 소나무 등
아름다운 자연의 정취에 취할 수 있으니 묵객들의 예술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우리도 활래정에서의 풍류를 즐겨볼 수 있다. 선교장에서 한옥체험을 할 경우 활래정에서 다도를 배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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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는 금강산을 유람하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선교장에 머물며
'붉은 잎으로 산에 깃들어 살겠다' 는 뜻의 '홍엽산거(紅葉山居)’ 라는 글을 남겼다.
300년이 넘는 선교장 집안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 선교장박물관에서 추사 김정희, 백범 김구 등
유명인사들이 남긴 글씨를 직접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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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래정을 지나니 본격적인 선교장 건물 앞에 이르게 된다.
길게 늘어선 행랑채 사이로 문이 두 개가 있는데
‘선교유거’(仙嶠幽居)란 현판이 걸려 있는 솟을대문은 과거 양반 남자만 드나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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솟을대문에서 왼쪽으로 들어가면 보이는 아름다운 사랑채는 열화당(悅話堂)이다.
열화당이라는 이름은 중국 송나라 시인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의 ‘悅親戚之情話(열친척지정화)’ 구절에서 따왔다.
‘친척들의 정다운 이야기를 즐긴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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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장을 방문한 손님들이 머물다 가는 곳은 열화당만이 아니다. 선교장의 사랑채는 세 단계로 구분되었다고 한다.
그들의 학문과 사람 됨됨이를 보아 아주 귀하다 여겨지는 선비만이 열화당에 머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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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학문과 식견이 있는 자는 중사랑에, 평범한 나그네들은 행랑채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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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장의 아름다움과 편안함에 빠진 손님이 계속 떠나지 않고 머물 때의 대처법도 있었다.
옛날 밥상은 각 반찬마다 위치가 정해져 있었는데 손님이 떠나주길 바랄 때면 그 위치를 바꾸어 놓았고,
그러면 손님은 눈치채고 다음날 떠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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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화당은 일반적인 전통 한옥과 달리 유럽 양식의 차양이 섞여있다.
조금 어색하고 특이한 이 구조는 개화기 열화당에 머물고 간 러시아공사관 직원들이
극진한 대접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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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화당에서 이어지는 솟을대문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안채주옥이 나온다.
1703년 선교장 최초로 지어진 건물로 안방마님인 종부의 거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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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주옥의 오른쪽에는 집안의 딸들이나 여자 손님들이 머물던 동별당이,
왼쪽에는 식구들이 공부하던 서재인 서별당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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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 바깥의 외별당은 분가한 자녀들이 거처로 사용하던 곳이다.
서별당은 행랑채, 중사랑, 초정 등과 함께 한옥스테이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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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 후원의 초정은 1820년 초가로 지은 정자다. 이곳에서 선비들은 글을 읽고 쓰며 검소와 덕을 배웠다고 한다.
초정 녹야원 인근의 570년 수령 주엽나무가 위엄있는 자태를 내뿜으며 선교장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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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석꾼의 곳간채를 들리지 않을 수 없다.
곳간에는 항상 곡식이 가득했는데 흉년이면 마을 사람들에게 쌀 수천 석을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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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색하고 이기적인 부자들은 흉년이 들면 논밭을 싸게 사들여 가난한 자들을 더욱 가난하게 하고
본인의 배를 불리기만을 취했지만 선교장 사람들은 곡식을 나누며 이웃과 함께 살아가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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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간에 담긴 것은 곡식만이 아니었다.
1908년에는 곳간채를 개조하여 동진학교를 만들어 신학문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백범 김구 선생, 이시형 선생 등이 학교 설립을 도왔고, 영어교사로 몽양 여운형이 활동하였다.
하지만 일제에 의해 폐교되고 말았다.
이후에도 선교장은 독립자금을 제공하며 나라 독립을 위해 힘을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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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년 된 소나무가 병풍처럼 두른 선교장의 풍경이 한 폭의 그림 같다.
후원에 올라 소나무 숲으로 들어가니 상쾌한 공기와 함께 선교장이 한 눈에 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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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 참 크다.
수많은 나그네를 먹이고 재웠던 길게 늘어선 행랑이 만석꾼의 위엄을 보이는듯 인상적이다.
문화적 소통과 나눔의 미덕을 가졌던 만석꾼의 집 선교장에는
외적인 아름다움과 여유를 넘어 정신적인 풍요로움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