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전시
- 기간 2022.07.01 (금) ~ 2022.07.20 (수)
- 시간 10:00 - 18:00
- 장소 제1,2,3전시실
- 관람등급 전체관람
- 장르 회화, 사진, 영상, 설치 등
- 가격 무료
- 주최 강릉아트센터
- 문의 033-660-6800
상세정보
● 마법미술관: 웰컴, 상상플러스 눈과 미술, 그리고 아이 1. 미술은 우리 눈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활동이다. 눈은 보는 일과 아는 일, 환상과 상상을 키우는 일을 동시에 한다. 본다는 것에는 이처럼 다양한 일들이 스며들어 있고 관계되어 있다. 우리는 언어를 배우기 전에 우선 ‘본다’. 보는 일은 꿈꾸는 일이고 환상을 보는 일이자 상상력을 자극하고 그로부터 더 멀리 밀고 나가게 해주는 모험과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그림을 그리는 일 역시 교육적이고 도전적이자 모험적이다. 아이들에게 보는 것의 중요성과 미술교육은 그래서 소중하다. 당연히 모든 전시는 그런 맥락에서 작동한다. 전시는 아이들에게 보는 방법을 일러주고 보는 것의 중요성과 다양한 보는 방식과 그 결과물, 나와 다른 이들이 바라보는 사물과 세계의 차이 등을 깨닫게 해준다. 그것은 새로운 세계로 초대해주는 일이다. 기존의 세계와는 차원이 다른 세계를 보게 해주고 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자신이 다른 사람으로 한 단계 질적 도약을 이룬다는 뜻이다. 그로 인해 아이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성숙한다. 좋은 전시는 흥미롭거나 재미를 주거나 낯설거나 놀라움을 안겨준다. 늘 보던 것을 다시 보여주지 않는다. 전시란 특별한 의미를 지닌 미술작품을 특정한 공간에 일시적으로 가설해 선보이는 의도적인 문화 행위다. 그것은 미술에 대한 각자의 언급이고 기존 미술계의 상식화된 개념에 개입하는 일이며 동시에 새로운 발언, 낯선 감각과 사유를 발생시키는 장(場)을 마련하는 일이다. 미술 행위는 기존 미술을 ‘포월’ 하는 일이다. 그것을 온몸으로 에워싸면서 타고 넘어가며 뭔가 낯선 것을 저질러 놓는 것이자 기존의 것들을 지속해 들쑤시면서 해찰해 대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야 뭔가 조금이라도 희한한 게, 재미난 게 나오는 법이다. 그렇지않으면 늘 보았던 것, 익숙한 것, 관습적인 것을 매번 반복하게 된다. 지금까지 해오던 것을 그저 ‘쓱’ 하나 밀어낼 수도 있다. 그러면 전시는 별다른 의미를 구현하지 못하고 생산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 전시라는 미술의 장은 모든 가치가 자유롭게 비판, 구현 가능한 유일한 영역이다. 전시는 우리에게 특정 작품을 보여주고 작품의 한계와 가능성, 미술에 대한 다양한 개념, 작가들이 물질/매체를 다루는 놀라운 감각과 솜씨, 그리고 작품을 통해 교육적, 소통적, 문화적, 정치적 메시지를 전해준다. 그런 의미에서 전시는 대단히 중요한 문화적 행위이고 공공성의 표현이자 정치적 실천의 장이기도 하다. 그만큼 전시가 차지하는 위상은 중요하다. 그것의 규모가 크든 작든, 사람들이 많이 와서 보든 그렇지 않든 간에 모종의 무게감이 만만치 않다는 뜻이다. 오늘날 미술은 시각의 새로운 형식, 나아가 삶과 사물의 새로운 형식, 새로운 가치를 볼 수 있게 하는 방법과 방식의 변화를 지속해서 추구해왔고 이를 위해 분투해 온 역사다. 그런 과정을 거쳐 미술은 보는 문제의 장을 구성해왔다. 바로 여기에 미술의 가치가 존재한다. 전시는 이것을 보여주고 구현하고 실천하려는 문화 행위이자 시각 문화교육이라고 앞서 언급했다. 2.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전시는 더욱 중요하다. 꿈과 상상력, 환상이 더욱 활달하게, 활기차게개진되어야 한다. 이제 세계와 사물에 대해 인식해가는 과정에서 아이들은 보는 행위를 통해 사회로 편입해 들어간다. 그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동시에 그로부터 부단히 벗어나서 신선한 시선과 사유를 지녀야 한다. 바로 그 지점에 전시가 개입한다. 눈으로 가능한 미술이 참여하고 여러 눈들이 개입하는 다양한 작업들이 전개된다. 그런데 우리 눈은 또한 매우 의심쩍은 감각기관이다. 눈은 착각을 일으키고 속기 쉬우며 오염되기도 쉽다. 아울러 눈은 문화적, 교육적 훈육의 결과로서 자리한다. 보는 일은 학습에 의해 이루어진다. 아이들이 보는 것과 어른들이 보는 것은 다르며 알고 보는 것과 모르고 보는 것 역시 다르다. 본다는 것은 문화적, 심리적, 지적인 것들과 관계 맺는 매우 다층적이고 복잡한 일이다. 아득한 시간대에 최초의 생명체가 발아하던 저 깊은 바닷속, 해저에 있던 원생 세포 중 햇살이 그립고 수면 위 세상이 궁금한 세포가 위로 불거져 튀어 올라온 것이 나중에 인간의 눈이 되었다고 한다. 눈은 그만큼 호기심도 많고 욕망도 컸던 감각기관인가 보다. 그래서 우리 몸 맨 위쪽에 붙어있다. 욕망에 쉽게 노출된 눈은 유혹에 약하며 뇌와 가장 가까이 위치한 관계로 생각과 감정과 연결되는 직접적인 통로가 되는 한편 인간이 외부와 접하는 최초의 경계다. 눈은 자신의 온 몸을 그 앞으로 활시위처럼 당겨놓고 세상을 향해 겨냥되어 있다. 눈을 뜨면 세계가 있고 감으면 세계는 사라진다. 회화의 기원과 관련된 모든 신화적 이야기에는 인간의 눈을 속인 그림, 화가의 놀라운 손에 대한 기록들로 가득하다. 그러니까 미술은 애초부터 재현과 눈속임, 환영으로부터 시작해서 그에 관한 상이한 입장과 반성들로 점철된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회화 자체가 2차원에서 3차원적 공간을 부단히 창출해내는 기이한 공간형성과 관련되어 있고 우리 눈이 그러한 속성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눈과 미술의 관계는 숙명적이며 일루젼 역시 항상 뒤따르는 문제일 것이다. 반면 동양화론에 보면 ‘화자화야’(畵者畵也)라는 말이 있다. 그림은 그림/선일 뿐이라는 얘기다. 그림은 실제가 아니며 다만 이미지일 뿐이라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림은 하나의 이미지, 가상적인 환영일 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이미지를 실제와 부단히 동일시한다. 이미지와 실제가 서로 얽혀서 어느 것이 실제이며 어느 것이 이미지인지 구분조차 안가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까 애초에 동양에서 그림은 실세계를 유추하고 연상시키는 몇 가닥 기호 같은 선에 의존해 이를 매개로 실세계를 머릿속에서 떠올려보는 것이 바로 그림의 완성이고 진정한 감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특정한 시간을 가늠하는 그림자가 부재하고 그림들은 현실 그 자체로 육박될 필요를 느끼지 않았던 것 같다. 무엇보다도 정신적인 활력 속에서 그림은 이루어진다. 각자 그림을 보는 이들이 머릿속에서 그림 속 기호를 매개 삼아 실제 자연을 소요하는 듯한 느낌을 받고 그런 소요경을 환영 속에서 만들어나가면 된다. 그러고 보면 여기서도 역시 눈은 그 같은 정신적 활력이 가능하기 위한 필수적인 감각기관인 것만은 분명하다. 물론 눈뿐만이 아니라 인간 몸이 지닌 여러 감각기관 전체가 요구되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에 반해 그리스인들은 눈속임 회화와 조각에 대해 가장 예민한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회화나 조각의 형상이 실물 모델의 선별된 특색들을 모은 이상적인 형태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주장 아래 그들은 인간의 눈으로 보았을 때 가장 이상적이고 완벽하고 아름답다고, 조화롭다고 여겨지는 형태, 비례를 부단히 찾고자 열망했던 이들이다. 망막이 원하는 이미지를 충족하고자 했던 이들은 아닐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몸이 지닌 감각기관 중 눈을 우선했음을 보여준다. 동양이 몸 전체를 조화로운 유기적 관계 망 속에서 파악했다면 서구인들은 그 감각기관을 분리하고 차별화해서 그중 눈이란 감각기관을 유독 극대화하고 절대화했다. 르네상스시대 이래로 서구의 환영적인 미술의 역사와 전통은 곧 서구미술의 중심이 되었으며 그것은 결국 눈속임에 기반 한 미술인 셈이다. 주어진 사각형의 평면에 일루젼을 주기 위한 장치들이 개발되었고 매체 역시 그와 동일한 선에서 추구되었다. 이후 서구모더니즘 미술은 그러한 환영적 미술의 한계나 모순에 저항하고자 하는 미술이자 눈이라고 하는 불완전한 감각기관의 한계와 허약함을 부정한 데서 비롯된다. 유사성과 닮음에 입각해 마냥 속아 넘어가는 눈이 아닌 눈, 그림 안에서 외부세계의 대상을 찾고자 헤매는 눈이 아닌 화면 그 자체를 그 자체로만 들여다 볼 줄 아는 눈을 요구 했던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지닌 몸과 감각기관에 대한 회의나 불신과 연관된다. 결과적으로 재현회화나 눈속임 미술은 추방되고 그 같은 미술은 혐오되고 불순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눈속임 미술이 증발되거나 사라질 수는 없는 일이다. 미술이란 행위 자체가 이미 우리 눈의 감각기관이 지닌 속성과 결부되고 그림을 본다는 것은 그림 안에 지시된 대상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 무엇인가를 연상하고 떠올려보지 않을 재간이 없는 것이다. 우리 눈은 항상 그 무언가를 찾아 헤맨다. 호기심이 많고 지칠 줄 모르는 눈이다. 그림을 본다는 것은 그림 안에서 해독되고 느껴지고 인지될 수 있는 대상, 얼룩, 흔적을 찾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그것을 원천적으로 막거나 차단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간 구상과 추상, 재현과 비재현회화의 갈등과 대립이란 문제의식 자체도 지나치게 문제를 단순화시키거나 도식화시킨 데서 빚어진 것은 일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림 역시 새로운 시선을 요구한다. 그림은 구상이고 추상이자 환상이고 실제이기도 하고 그 모든 것이자 그로부터 멀리 달아난다. 3. 보르헤스가 말하듯 예술은 하나의 인공적인 꿈이다. 그것은 ‘눈을 뜨고도 꾸는 꿈’이기도 하다. 모든 이미지는 불경스러운 욕망이기도 하다. 그것은 실재가 아니라 환상이고 환영이자 현실에서는 결코 충족되지 못하고 실현되지 못하는 꿈 등을 그림 안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풀려나오는 가상이기 때문이다. 미술 자체가 일종의 환상이라서 그려진 그림은 그 무엇처럼 보이는 허구이자 이상한 물질들의 초현실적인 연출로 이루어진 낯설음을 제공해준다. 그것은 공허한 무와 허망한 가짜가 아니라 환상, 상상을 통해 형상화되는 현실, 이른바 ‘가능성의 세계’를 만드는 일이 된다. 그것은 일견 황당해 보이기도 하지만 주어진 현실을 비판하고 틈을 만드는 것이자 그로인해 또 다른 대안을 추구하는 일이다. 환상을 보여주고 꿈을 펼쳐 보이며 인공적인 꿈을 가시적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작가들은 분명 어른이지만 마음은 유년의, 아이들의 마음을 공유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아이들과 같은 꿈을 꾸고자 하는 이들이다. 마치 어린왕자와 같은 눈과 마음을 가진 자들이다. 그런 작가들은 주어진 현실계에서 행복한 어느 한 순간을 간절히 추억하고, 기억하고 꿈과 환상을 화면 위로 호명한다. 간절하게 불러본다. 그러자 지난 시간의 한 순간과 꿈이 새로운 몸을 빌어서 환생한다. 그곳에는 소멸된 시간이 불멸하고 지난 시간이 다시 역류하여 흐른다.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다시 그 시간은 유머와 해학성으로 단장하고 현실의 고단함과 온갖 근심을 망실시키며 따뜻하고 아름다운 동화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찰나적인 어느 순간을 영원히 응고시키며 나앉아 있다. 격렬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간은 이처럼 지난 시간을 하나의 결정적인 이미지로 일으켜 세워 시간에 저항해왔다. 꿈을 통해 현실의 고난을 비껴왔다. 어른이 되었지만 순진하고 순박했던 유년의 시절을 잃지 않기 위해, 그 순박한 시간을 망각 속에 내버리지 않기 위해 부단히 싸워왔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나이가 들고 사회 속에서 한 구성원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주어진 사회 안에서 요구하는 특정한 인간형으로 길들여지고 만들어진다는 얘기다. 그런 면에서 모든 인간은 훈육된 사람, 사물과 세계를 특정한 시각으로 보도록 학습 받은 이들이다. 학습은 불가피하게 요구되고 반드시 필요하지만 동시에 학습 받기 이전의 자신만의 시각, 마음을 상실하게 된다. 다른 이의 시선과 마음으로 보게 되고 이해하게 된다. 나를 잃어버리는 위험부담이 학습이고 나이 든다는 것이고 어른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나이가 들고 학습이 깊어질수록 본연의 순연한 마음과 맑은 눈은 또 어떻게 망실하지 않을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이 전시 또한 그런 의미를 새삼 되새겨보고자 기획된 전시일 것이다. - 박영택(경기대교수, 미술평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