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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8.06.12, 조회수 8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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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사임당 연보
내용  

1504년 

10월 29일 강릉 북평촌(北坪村), 지금의 오죽헌에서 아버지 평산 신씨, 어머니 용인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외가에서 태어난 신사임당은 어머니와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의 각별한 사랑과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어 세종 때 유명한 화가, 안견(安堅)의 그림을 본받아 산수(山水), 풀벌레, 포도, 매화 등 여러 가지 그림을 공부하였다. 타고난 총명함에다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교육에 힘입어 유교경전은 물론 글씨와 문장, 바느질과 자수에도 능했다.



1516년(13세)

아버지 신명화가 진사시험에 올랐다



1522년(19세)

덕수이씨 원수와 혼인하였다. 이원수는 사임당보다 세 살 위였다. 이 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1524년(21세)

서울에서 맏아들 선(璿)을 낳았다.

그 후 사임당은 경기도 파주, 강릉, 평창군 봉평 등지로 옮겨다니며 생활하였다.



1529년(26세)

맏딸 매창을 낳았다



1530년(27세)

둘째 아들 번을 낳았다.



1534년(31세)

둘째 딸을 낳았다.



1536년(33세)

동해 바다에서 선녀가 나타나 살결이 눈부시게 희고 오색 광채가 나는 옥동자를 사임당의 품에 안겨 주는 꿈을 꾼 지 열 달 만에 찬란히 빛나는 검은 용이 동해바다에서 침실로 날아드는 꿈을 꾸고 율곡을 낳았다.



1541년(38세)

강릉 친정에서 서울로 가던 중, 대관령 중턱에서 홀로 계신 어머니를 그리는 시를 지었다.


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외로이 서울로 가는 이 마음

돌아보니 북촌은 아득한데

흰 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 내리네.


서울로 올라온 후 시댁의 모든 살림살이를 관장하였다.



1542년(39세)

넷째 아들 우(瑀)를 낳았다. 우는 어머니 사임당을 닮아서 시·서·화·거문고에 모두 뛰어났다. 후에 우리나라 초성(草聖)으로 불리는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의 사위가 되었다.



1550년(47세) 

남편 이원수공이 지방에서 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서울로 운반하는 일을 관장하는 수운판관(水運判官)이 되었다



1551년(48세)

5월 17일 별세하였다. 파주 두문리 자운산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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